<여름의 빌라>에서 재개발 계획 직전의 집을 만나다.

‘오월의 푸른 하늘’ 책방지기가 전하는 건축 이야기

<여름의 빌라>에서
재개발 계획 직전의 집을 만나다.

문학 속의 집을 여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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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책방지기가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만나 같이 놀던 시절의 동네를 걸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친구와 함께 가지고 있던 추억의 장소들이 많이 사라져 아쉬움이 컸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친구들이 살던 빌라들이 모두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온다는 안내판을 본 순간이었습니다. 건물도 수명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설마 제가 놀러 다닌 친구들의 집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집은 전에 살던 곳보다 턱없이 작은 크기의 단독주택으로, 두 개의 방과 하나의 거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거실 벽을 이루는 네 면의 너비가 균일하지 않아 바닥은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었다. ~중략~ 누렇게 변색된 화장실 세면대, 물때가 낀 바닥 타일을 보는 순간 나는 고향에 두고온 우리의 집이 그리워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름의 빌라 – ‘고요한 사건’ 中)

 

소설 <여름의 빌라> 중에서 ‘고요한 사건’이라는 에피소드는, 시골 생활을 하다가 서울의 달동네로 재개발이 될 것이라 믿으며 이사를 오게 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님의 결정으로 얼떨결에 살게 된 서울집의 첫인상은 썩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서 처음 보이는 거실이 어딘가 찌그러져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도배의 문제인지, 건물 자체의 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주인공은 기분이 상해 있는 상태였기에 실제보다 더 크게 비틀어졌다고 느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오래된 집의 화장실에서 볼 수 있는 변색된 세면대와 좌변기가 떠오르고 촘촘히 박혀 있는 타일들 사이의 줄눈은 노랗거나 까맣게 변색되고 일부는 다 뜯어져 나가 있는 모습이 상상됩니다.
‘고향에 두고 온 우리의 집’이라는 표현을 통해 주인공은 이사 온 집을 가족과 함께 살아갈 공간인 ‘우리의 집’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당히 적대적이고 슬픔과 분노가 함께 느껴지는 표현이지 않나 싶습니다. 건축에 광고문구로 자주 사용되는 ‘내 집처럼 편안한’이라는 단어가 순수한 영혼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위의 집처럼 생기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원하는 공간은 편안하고 좋은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잠시, 학교 생활과 함께 친구가 생기고 남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집’이라고도 부르기 싫었던 집은 어느 순간 주인공네 집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살던 집의 현관문 윗부분에는 바깥을 내다볼 수 있도록 동그랗게 유리창이 나 있었다. ~중략~ 그토록 숨막히는 광경을 나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중략~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 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고, ~후략」 (여름의 빌라 – ‘고요한 사건’ 中)

주인공은 ‘우리 집 현관문’이라고 말하며 그 공간을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현관문이 정확히 어떤 문이고 이름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자세한 설명이 없더라도 우리는 그 현관문이 어떻게 생겼을지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갑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현관이라는 공간에서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기에 훗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재개발로 인해 집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겠지만 그 현관이 아니었다면 주인공은 평생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집을 기억하고 설명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건축적 용어보다는 더러움의 정도로, 정확한 수치보다는 간단한 설명이 곁들여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재밌고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겁니다. 좋은 집이면 더 즐거운 표현으로, 좋은 공법이면 더 알기 쉽고 재밌는 표현으로, 그 답이 문학에 있기를 바라며 새로운 표현과 함께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글.사진제공 | 오월의 푸른하늘 대표 최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