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조경에 대한 소고 <빛>

주택조경에 대한 소고 : 빛


 

화단에 햇살이 들고 담쟁이덩굴 위로 햇빛이 반짝일 때면, 꽃나무들은 제각기 아름다움을 드러내곤 했다. 글라디올러스는 눈부신 색채를 마음껏 뽐냈고, 푸른 헬리오트로프는 마법에 걸린 양 자신의 고통스러운 향기 안에 갇혔다. 줄맨드라미는 체념한 모양으로 축 늘어졌고 매발톱꽃은 까치발로 서서는 종 모양의 네 겹 여름 꽃을 피워 올렸다.”

<헤르만헤세 정원일의 즐거움’-유년의 정원 편에서>

 


정원에 쏟아지는 찬란한 햇빛을 보고 감동해본 적이 있는 독자분이 계시다면 아마도 정원 가꾸는 일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헤르만 헤세의 이 문구가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올 듯 하다.

 

손수 가꾸는 정원의 모습이 눈에 그려질 듯 잘 묘사된 이 문장에서 우리는 헤르만 헤세의 정원에 대한 애착과 더불어 빛이 가진 속성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의 생성과 소멸을 관장하는 원천적인 에너지로서의 객관적인 기능성과 계절과 시간대별로 다르게 느껴지는 주관적인 느낌으로서 분위기와 확장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빛을 얘기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햇빛이 가진 강렬함과 생명력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햇빛을 통해 식물들이 광합성을 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광합성 작용을 할 때 이산화탄소를 소비함으로써 온실효과를 저감하는데 기여하고 우리들이 느끼는 쾌적함에 상당부분 광합성효과로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빛에 대해 정원에 드는 햇빛과 식물들에 미치는 영향 정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빛은 우리들에게 너무 큰 존재이다.) 간단한 그림으로 광합성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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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광합성 과정 및 수목생육 도식도

 

모델로 나온 느티나무는 수령 15~20년 정도이며 경부고속도로 양재 나들목 주변 녹지에 위치해 있다. 수형이 균형 잡혀 잘 자라고 있고 누가 봐도 건강한 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느티나무를 보이지 않는 뿌리까지 그림으로 표현해 보았다.

 

이 나무의 생육환경은 전형적인 가장 이상적 환경이다. 우선 햇빛이 하루 종일 들어 광합성을 충분히 할 수 있고 주변나무와의 거리가 있어 크게 자랄 수 있는 공간이 넉넉하다.(주변 나무와 경합을 벌이지 않아도 된다) 약간 경사진 땅은 배수가 잘 되는 기본 조건을 가지고 있고 탁 트인 공간에 있어 바람도 잘 통한다.(바람은 외부에서 자라는 수목에게 생각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모델이 된 느티나무를 보면서 필자는 나무에게도 팔자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 나무는 무척 팔자가 좋은 나무이다. 이상적인 환경에 자라면서 무엇보다 이식이나 훼손 등의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매우 중요한 교통의 요지에 상징적 공간 안에 심어져 큰 변수가 없다면 이곳에서 장성해서 자기 본연의 아름다움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극면한 반대의 예로 상가건물에 준공용 수목으로 심어져서 허가조건을 충족시킨 후 폐기되거나 어두운 구석에 심어져 제대로 자라지도 못하고 평생을 버텨야 하는 수목을 생각해본다면 이 느티나무의 조건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알 수 있고 주택정원의 수목 식재에 대한 기본 개념도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다.

 

광합성을 통해 생성된 에너지로 눈에 보이는 가지와 잎(수관)도 성장하지만 근계로 보내진 에너지로 뿌리도 같이 성장한다. 건강한 나무의 근계가 가진 흡수력과 수관의 크기는 비례한다. 이 균형이 개질 때 나무는 활력을 잃거나 손상을 입는다. 단적인 예가 이식을 위해 뿌리를 모두 잘라 뿌리분만 남겨서 다른 곳에 심어질 때이다. 뿌리가 잘린 만큼 수관에 있는 가지와 잎도 잘라내어 그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큰 손상을 입는다.

 

양재 나들목 근처에 있는 현대자동차의 회사스템에 비유해서 광합성을 간단히 설명해보자면 근계(뿌리)는 본사라고 볼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굵은 주간과 가지들은 회사의 제조 및 영업시스템, 잎은 영업사원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뿌리에서 흡수된 물과 양분(완성차)을 영업망을 통해 잎까지 올려주면 영업사원들은 그 자동차를 팔아(광합성) 포도당과 탄수화물을만들어 자체적으로 소비하고(수당,급여), 남은 에너지로 다시 성장을 위해 환원되어 수관과 근계가 사라지고(투자와 확장) 일정비율은 줄기와 뿌리 등에 보관된다. (자본금 축적)

 

기본개념으로만 본다면 회사시스템과 싱크로율이 거의 100%에 가깝다. 이러한 선순환구조 시스템의 중심에 빛이라는 근원적인 에너지가 있다.

 

식물은 수많은 종류가 있고 기본적으로 빛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한 요구도는 식물마다 다르다. 빛에 대한 요구도를 기준으로 양수, 중용수, 음수 등의 기준으로 나누는데 하루 중 햇빛을 받는 시간의 요구도에 따른 분류이다. 대표적인 양수는 우리가 잘 아는 소나무이다. 소나무는 햇빛을 못 받는 가지와 잎은 도태되어 목질화된 가지로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과실수들은 모두 양수라고 볼 수 있겠다. 과실을 맺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생장을 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에너지를 요구하기 때문에 많은 광합성양이 요구된다. 음수는 햇빛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수목이 아니라 적은 햇빛 양에서도 견뎌내는 수목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적절한 양의 햇빛은 음수의 경우에도 더 건강하고 활력 있는 생장을 하도록 도와준다. 주목, 사철나무, 회양목, 노각나무 등이 있다. 중용수는 양수와 음수의 그 중간 성질을 지니는 수목으로 양수 다음으로 많은 수목들이 중용수에 해당한다. 이러한 수목들의 빛에 대한 개별적인 특성을 식재구성을 할 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핵심 요소라고할 수 있다.

 

사진에서의 사례처럼 빛에 대한 요구도를 적절히 반영하여 식재구성을 하여야 식물이 지닌 본연의 아름다움을 구현할 수 있고 조화로운 경관을 연출할 수 있다. 빛이 잘 드는 곳부터 반음지, 음지까지 골고루 분포시킬 수 있다면 과실수와 소나무, 허브류와 야생화, 수국류, 이끼나 양치식물류 등까지 다양한 식생을 도입하여 다채로운 풍경을 연출할 수 있다.

 

또한 정원은 만든 사람의 의도와 별개로 고유의 생명력을 갖게 되는데 환경조건에 맞추어 늘 변화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끼가 번식하는 모습이다.

 

이끼는 적절한 습도와 너무 세지 않은 약간의 빛, 배수가 잘되는 토양, 표면이 거친 바위류 등에서 잘 자라는데 이끼가 있는 정원은 왠지 오래되어 보이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정원에서 실제적인 감동을 주는 것은 이끼나 작은 풀꽃, 앙증맞은 야생화 같은 디테일한 소소한 아름다움들이다.

 

빛을 고려한 다양한 식생구성은 정원에 음영을 드리우게 되는데 사진에서처럼 밝은 곳과 어두운 곳, 그 느낌이 점진적으로 바뀌는 곳(그라데이션효과), 빛이 퍼져나가는 느낌의 공간, 함축된 느낌의 공간 등의 다채로운 느낌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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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정원시공사례- 빛의 요구도를 감안한 식생도입과 연출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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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음영효과 사례사진- 가지가 드리운 모습이 돌판석과 잔디위로 음영을 그리는 모습

 

정원에서 또한 빠질 수 없는 것이 조명의 역할이다. 밤에 바라다 보이는 정원은 낮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오는데 문명의 빛이 주는 호나상적인 문화라고 생각한다. 해가 지고 서서히 어둠이 짙어갈 때쯤 정원에 나와 있으면 조명에 맞추어 식물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을 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시간이다. 또 한밤중에 정원 조명을 켜지 않고 후레쉬 조명으로 여기저기 관찰하다보면 낮에 볼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저녁에 지인들과 밤의 정원을 감상하며 와인을 한잔 곁들인다면, 가끔 들려오는 새소리,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책을 본다면... 정원 자체는 정말 훌륭한 문화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고 그 공간에 담을 수 있는 여러가지 체험들은 몇 가지로 한정 지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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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저녁에 즐기는 정원, 정원조명 

 

여기까지 쓰고 나니 빛으로 가득한 정원의 모습을 아주 조금 맛 본 느낌이다. 빛이 가진 원초적인 힘에서 비롯되는 모든 식물들의 생명과 정원에 투영되는 빛의 다양한 모습, 문명의 힘으로 도입된 조명에 의한 정원의 느낌과 체혐영역 등등 빛과 관련된 소소한 주제를 가볍게 터치하듯 필자의 글과 함께 독자분들의 느낌이 어떨지 궁금하다.

 

늘 우리 곁에 있어서 당연한 듯 존재했던 빛을 자신만의 프리즘에 통과시켜 좀 더 특별한 스펙트럼으로 정원에 입힐 수 있다면, 우리들의 정원문화는 스토리와 다양한 색깔을 갖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 저의 소소한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