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기억이 머무는 자리에 서다.

'오월의 푸른 하늘' 책방지기가 전하는 건축 이야기 - 문학 속의 집을 여행하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기억이 머무는 자리에 서다.

글.사진제공 | 오월의 푸른하늘 대표 최린

 

4월16일이 되면 눈만 감아도 생각나는 공간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 설계실에서 교수님을 기다리며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친구 한 명이 큰 소리를 내는 라디오를 가지고 설계실로 들어왔습니다. 라디오에서는 긴급속보라고 하면서 전라남도 앞바다에 수학여행을 가던 유람선이 침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작업 마무리를 짓고 있던 학생들 모두 숨을 죽이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조금 쌀쌀한 날씨였지만 설계실은 전날부터 밤을 샌 사람들의 온기로 따뜻했습니다. 진한 본드향이 공기 중을 떠돌고 있었고 문이 열리는 작은 창문 앞 나무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한층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단어들은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하던 우리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때의 그 온도, 습도, 밝기 등이 아직도 모두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그와 비슷한 장소에 들어가게 되면 혼란스러운 그 날이 문득 떠오릅니다.

4. 시골책방.png

한강 작가의<작별하지 않는다>는 오랜 시간 동안 잊혀 있던 ‘제주4.3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소설입니다. 너무 긴 세월이 지나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 다음 세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슬프지만 이 소설 속에서 울부짖는 그들의 작은 증언들은 독자의 마음을 울게 만듭니다. 주인공 ‘경하’는 갑작스럽게 연락 온 친구 ‘인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제주도로 향합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무엇이 현실이 구분이 안 되는 찰나의 순간, 제주4.3 사건의 기억 조각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인선이 고개를 돌려 돌아보는 안방 쪽을 나도 돌아본다.

반쯤 열린 미닫이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다.(중략)

이것보다 조금 넓은 돌을 데워서 여기 얹고 안방 벽에 기대앉아 계시곤 했어.

눕는 것보다 그 자세가 숨이 더 잘 나온다고 했어.」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던 그 시절의 사람들의 행동들은 평범한 사람에겐 그저 이상하게만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게 되면 그들의 그 행동들은 기억 속에 각인되어 공간과 함께 되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작디작은 섬에서 일어난 비극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각자의 형태로 남아 우리를 반성하게 만듭니다. 작가의 세계관 속에서 공간을 체험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더욱 깊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공간은 사람들마다 다르게 기억됩니다. 책방지기는 설계실을 보면 세월호 사건 당시의 기억뿐만 아니라 즐거웠던, 슬펐던, 아쉬웠던 많은 생각들이 함께 떠올라 옵니다. 공간은 새로운 경험들이 겹겹이 쌓여 더욱 의미 있는 곳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설계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세상에 있는 많은 공간들이 개개인을 되찾을 수 있는 곳이 되어 가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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