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옷을 입히다
Episode 12.
우리에게 낯선 일본의 커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일본은 오래전부터 공간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 독특한 미적 감각과 철학을 발전시켜 왔다. 단순히 공간을 나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이의 ‘틈’과 ‘여백’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깊게 녹아 있다. 이는 일본 건축의 핵심 개념 중 하나로 자리잡았으며, 이러한 공간 감각은 단순한 구조물에 머무르지 않고 생활 속 도구와 장식 요소에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직물’이다. 커튼은 이러한 공간 철학을 가장 직관적이면서도 유연하게 드러내는 수단 중 하나다.
일본 전통 가옥인 ‘와시쓰(和室)’를 떠올려보면, 단단한 벽으로 구획된 구조보다는 미닫이문인 후스마(襖), 반투명한 종이문인 쇼지(障子), 그리고 천이나 대나무로 만든 노렌(暖簾), 스다레(簾) 등 다양한 ‘유동적인 경계’가 공간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필요에 따라 열리고 닫히며, 한 공간이 다양한 목적과 의미로 전환될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노렌은 출입문 위에 걸어 공간을 부드럽게 구분하고,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암시적으로 나누는 역할을 해왔다. 반면 스다레는 여름철 햇볕을 막으면서도 바람은 통하게 해주는, 실용성과 미학을 모두 갖춘 전통적인 직물이다.
이러한 전통 커튼들은 단순한 가림막을 넘어서 일본인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계절이 바뀌면 집 안의 커튼이나 장식이 자연스럽게 교체되었고, 이는 단순한 인테리어 변화가 아닌, 자연과 호흡하고 살아가는 생활문화의 한 부분이었다. 손님이 방문할 때 커튼을 교체하거나,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무늬나 색의 천을 사용하는 등 커튼은 집 안의 분위기를 조정하고, 때로는 집주인의 정성과 배려를 드러내는 매개가 되었다.
또한 일본의 커튼 문화는 지역성과 계절감, 심지어 계층적 문화까지 담아내는 ‘텍스타일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전통 공예 방식으로 염색된 노렌은 특정 지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며, 사케 양조장이나 오래된 식당 앞에 걸린 노렌은 브랜드 자체의 역사와 자부심을 상징한다. 특히 교토 같은 전통 도시에서는 수십 년, 수백 년 된 가게들이 여전히 고유의 노렌 디자인을 유지하며 그 역사성을 이어간다.

더집안 원빈 본부장
010-6613-7655
집을 아름답게 꾸미겠다는 가업의 뜻을 이루고자 미국에서 다양한 건축형태와 그에 맞는 스타일링을 공부한 후, 현재 한국의 트렌드에 맞춰 다양한 패브릭소재들을 이용하여 집 안을 꾸미는 홈 스타일리스트이다.

일본 커튼의 기원과 상징
일본 커튼의 시초는 ‘노렌’이다. 노렌은 가게 입구나 집 안의 공간을 나누는 용도로 사용된 직물로, 그 역사는 최소한 헤이안 시대(794~118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에는 먼지나 햇빛을 차단하고 여름철 통풍을 돕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상징적 기능이 부각되었다. 당시 귀족 가문의 저택이나 무가(武家)의 거처에서도 노렌은 일종의 예절과 위계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출입이 허용된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자연스럽게 구분하는 장치로 사용되었다.

▲노렌
에도시대에 들어서는 노렌이 상점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활용되며, 장인의 문양, 상호, 성씨 등이 새겨진 노렌은 브랜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시기의 상점들은 노렌의 디자인을 통해 자신들의 철학과 자부심을 표현했고, 손님들 또한 노렌을 보고 신뢰와 명성을 판단하였다.
특히 노포(老舗)로 불리는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전통 상점들은 대대로 전해 내려온 노렌을 가문의 상징처럼 여겼다. 이로 인해 하나의 노렌은 곧 그 공간의 성격과 주인의 품격을 나타내는 매개체로 발전한다.
귀족이나 상류계층의 주거 공간에서는 스다레가 사용되었다. 대나무나 얇은 나무를 실로 엮어 만든 이 커튼은 창문이나 베란다에 걸려 햇빛을 부드럽게 걸러주는 동시에 외부 시선을 차단하는 기능을 했다. 여름철에는 바람이 잘 통하게 하면서도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어 실내 온도를 조절하는 데 유용했으며, 자연을 가까이에서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요소로도 기능했다.
이러한 스다레는 재료 자체가 가지는 질감과 소리, 투과율을 고려해 계절마다 교체하거나 장식 요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자연 친화적이고 계절감이 반영된 소재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었고, 이는 일본 전통 건축의 ‘마(間)’ 개념과 조화를 이루며 공간을 구성했다.

스다레는 또한 시각적 효과 외에도, 빛의 양과 각도에 따라 공간의 분위기를 섬세하게 조절하는 기능이 있어, 당대의 미적 감각과 실용성이 결합된 결과물로 평가된다. 특히 고급 저택이나 정원과 접한 다다미 방 등에서는 스다레를 통해 외부 풍경을 은은하게 감상하는 것이 하나의 정취로 여겨졌으며, 이는 ‘보이는 듯 안 보이는’ 일본 특유의 미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또한 일본 전통 행사나 의례에서도 커튼은 중요한 역할을했다. 신사나 절에서는 제례 공간을 구분 짓는 용도로 사용되며, 커튼의 색상이나 자수 문양은 해당 공간의 신성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신사에서는 붉은색이나 자주색의 직물을 사용해 신성한 경계를 표시하고, 절에서는 연꽃이나 구름, 봉황 등의 문양을 자수로 넣어 불교적 상징을 강화하였다. 축제나 혼례, 장례 등의 의례에서도 커튼은 사람의 동선을 유도하고, 행사의 격식과 성격을 시각적으로 설명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커튼이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 계층, 종교적 상징, 지역 정체성 등 복합적인 의미를 담아내는 문화 요소였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무가의 문장이나 지방 직조 기술이 반영된 직물은 커튼 하나에도 ‘어디서 만들었는가’, ‘어느 가문에 속하는가’를 드러내는 지표로 작용했다.
특히 지역 전통 직물 기술은 커튼 소재의 질감, 패턴, 색감에 고스란히 반영되며, 이는 후대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다. 일본 각지의 직조 마을에서는 아직도 전통 방식으로 노렌이나 스다레를 제작하며, 이를 현대 공간에 맞게 재해석한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서양 커튼의 도입과 새로운 문화의 형성
메이지 유신(1868년)을 기점으로 서양 문물의 대대적인 유입이 이루어지며, 일본 가정에도 본격적으로 유리창이 등장하고 커튼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도입된다. 초기에는 관공서나 군사시설, 고급 호텔, 외교 공간 등을 중심으로 커튼이 설치되었고, 이후 점차 귀족과 상류층 가정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 일본에서 커튼은 단순한 가림막이나 장식물을 넘어서, 근대화된 서양식 삶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서구식 주거문화로의 전환을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하는 실내 인테리어 요소 중 하나로 주목받았다.
이 당시 일본에서 사용된 커튼은 유럽에서 수입된 실크, 벨벳, 레이스 등 고급 원단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원단은 당시 일본 내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하고 고가의 소재였기 때문에, 단순한 실용품이 아니라 부의 상징으로 작용하였다. 커튼은 햇빛 차단이나 시선 가림이라는 기능적 요소보다는 장식성과 심미성에 중점을 두었으며, 드레이프 처리나 태슬 장식 등을 통해 화려함을 강조했다.
특히 유럽식 이중 커튼 구조(레이스 커튼 + 암막 커튼)는 상류층 주택에서 유행처럼 번지며, 정교한 창호재단과 커튼봉의 금속장식까지 하나의 예술적 공간을 연출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인의 주거문화와 미적 감각에도 점차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주거공간은 열린구조와 자연의 흐름을 중시하는 방식이었지만, 커튼의 보급은 공간을 ‘닫는’ 문화로의 전환을 가속화시켰다. 이는 단순한 인테리어의 변화가 아니라, 사적 공간을 중시하고 외부 세계와의 물리적·심리적 분리를 강조하는 서구적 생활양식의 내면화 과정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커튼은 공간의 물리적 경계인 동시에, 근대적 개인주의와 프라이버시 개념이 일본 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기여한 문화적 도구로 작용하게 된다.
당시 잡지, 가정용 카탈로그, 백화점 전단지 등에서 커튼은 ‘근대적이고 세련된 생활’의 아이콘으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커튼이 단순한 소비재가 아닌, 교양 있고 감각 있는 가정의 상징으로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부유층 여성들이 응접실 커튼을 직접 고르고 설치하는 장면은 여성의 안목과 취향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상적인 근대적 여성상’을 형성하는 중요한 시각자료로 활용되었다.
커튼의 색상, 무늬, 소재 선택은 단순한 취향을 넘어 가족의 문화적 수준과 미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고, 이는 소비문화 전반에 ‘공간의 미학화’라는 흐름을 촉진시켰다.

현재 일본 커튼 시장의 양상
현재 일본의 커튼 시장은 높은 기술력과 소비자의 세분화된 취향을 반영하여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다. 단순히 창을 가리는 기능에서 벗어나, 공간의 분위기를 조율하고 사용자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하는 중요한 인테리어 요소로 자리 잡은 것이다.
예를 들어, 도시의 소형 아파트에서는 공간 활용을 고려해 슬라이딩식 커튼이나 블라인드가 주로 사용되고, 컬러나 패턴 또한 심플하고 모던한 스타일이 선호된다. 반면, 전통 가옥이나 중산층 이상의 단독 주택에서는 풍부한 드레이프와 고급 패턴이 들어간 클래식한 커튼이 여전히 인기다. 이들은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공간의 품격을 높이는 장식 요소로 여겨지며, 커튼 레일과 타이백, 장식 브라켓 등의 디테일한 마감까지 신경 쓰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고령화 사회에 대응하는 커튼도 등장하고 있다. 노인층을 위한 커튼은 가벼운 소재, 손쉬운 개폐 기능, 높은 가시성 색상 등을 특징으로 하며, 버튼 하나로 조작할 수 있는 전동 커튼이나 자동 타이머 커튼 시스템도 확대되고 있다.
여기에 항균, 탈취, 알러지 방지 기능이 포함된 제품은 건강을 중요시하는 가족 단위의 소비자에게 특히 선호된다. 특히 호흡기 질환이 있는 노인이나 아이를 둔 가정에서는 이러한 기능성 커튼을 적극적으로 찾는 추세다. 일본 소비자들은 기능성과 심미성뿐 아니라 유지 관리의 편리함도 중시하는데, 세탁이 용이한 소재, 먼지가 덜 달라붙는 섬유, 주름이 잘 생기지 않는 가공 등이 주요 고려 요소로 작용한다.

디자인 트렌드에서는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내추럴 무드가 강세다. 나뭇결 패턴, 식물 프린트, 흙색 계열의 색상 등이 자주 사용되며, 소재에서도 린넨이나 면처럼 자연의 질감을 살린 원단이 각광받는다. 이러한 트렌드는 팬데믹 이후 실내 자연 요소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 배경과 맞물린다. 바깥 활동이 제한되면서, 사람들은 실내에서도 자연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선호하게 되었고, 커튼은 그 중심에 있는 요소 중 하나로 부상했다.
최근에는 커튼을 계절별로 교체하며 공간 분위기를 주기적으로 바꾸는 소비자도 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커튼의 계절 제품화도 주목받고 있다. 봄에는 밝고 통기성 좋은 레이스 커튼, 겨울에는 두껍고 중량감 있는 암막 커튼으로 바꾸는 식이다.
이러한 흐름은 소비자의 반복 구매를 유도하며 커튼 시장의 활력을 더하고 있다.

일본 커튼 시장의 미래와 방향성
미래 일본 커튼 산업의 핵심은 자동화, 에너지 절약, 친환경 소재의 활용으로 요약된다. 예를 들어, 태양광을 흡수해 전기를 생산하거나 단열 성능을 극대화하는 커튼 원단이 상용화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일부 커튼 브랜드는 자사 제품이 여름철 냉방비를 평균 12~15% 절감해준다는 데이터를 통해 실질적 가치를 홍보하고 있다.
지속 가능성 측면에서는 일본 국내는 물론 해외시장에서도 환경 인증이 중요한 지표로 자리잡고 있다. GOTS(유기농 섬유 기준), OEKO-TEX 등 국제 인증을 획득한 커튼 브랜드가 소비자 신뢰를 얻고 있으며, 생산과정의 탄소 배출량을 공개하는 브랜드도 증가하고 있다. 한편 정부 차원에서도 친환경 인테리어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공공시설에 사용되는 커튼의 환경 기준을 상향 조정하고 있다.

일본에서 커튼은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문화적 산물이며, 공간과 사람을 잇는 하나의 언어다. 노렌과 스다레에서 시작된 커튼 문화는 서구적 요소와 결합하며 독특한 하이브리드 문화를 형성해왔고, 현대에는 기술과 디자인, 환경까지 고려한 복합 제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앞으로 일본 커튼 산업은 더욱 고도화된 기술과 정제된 미학, 그리고 윤리적 생산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세계 시장에서도 주목받는 문화 산업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크다. 커튼 하나에도 ‘일본다움’이 담기고, 그 속에 삶의 리듬과 공간에 대한 사유가 반영된다. 그것이 일본 커튼이 단순한 인테리어를 넘어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식되는 이유다.
또한 이를 통해 일본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적공간과 삶의 방식,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는지를 엿볼 수 있다.
* 월간빌더 카페 등에 업로드 되는 기사는 과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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